허고 나오다가 방자와 딱 마주쳤구나. “거 누구냐?” “아이고 나 방자요!” “너 이 밤중에 어찌 왔느냐?” “사또 자제 도련님 모시고 왔어요.” “아이고, 도련님이 오시다니? 귀중하신 도련님이 누지에 오시다니 천만뜻밖이오. 어서 안으로 올라가옵시다.” 도련님이 방으로 들어가 앉은 후에 방 안을 잠깐 살펴보니, 별 사치스러운 것은 없으나 뜻있는 주련만 걸렸겄다.
동벽을 바라보니, 주나라 강태공이 문왕을 만나려고 위수변 낚시질허는 거동 뚜렷이 걸려 있고, 서벽을 바라보니, 상산사호 네 노인이 바돌 판을 앞에 놓고, 어떠한 노인은 흑기를 들고 또 어떤 노인은 백기를 손에 들고, 대마상 패수를 보랴허고 요만허고 앉어 있고, 또 어떤 노인은 청려장 짚고, 백우선 손에 들고, 요만허고 굽어보며 훈수하다 책망 듣고 무안색으로 서있는 거동 뚜렷이 걸렸구나. 남벽을 바라보니, 관우, 장비, 양 장수가 활 공부 힘써 헐 제, 나는 기러기 쏘랴허고 장궁철전을 멕여 들고, 비정비팔으 흉허복실하야, 주먹이 톡 터지게 좀통을 꽉 쥐고, 앞뒤 뀌미 노잖게 대두 뻣뻣 머리 숙여, 깍지손을 뚝 떼노니, 번개같이 나는 살대 수루루루루 떠들어가, 나는 기러기 절컥 맞어 빙빙 돌아 떨어지는 거동 뚜렷이 걸렸구나. 북벽을 바라보니, 소상강 밤비 개고 동정호 달 오른디, 은은한 죽림 속에 백의 입은 두 부인이 이십오현을 앞에 다가 놓고 스리렁 둥덩 타는 거동 뚜렷이 걸렸구나. 서안을 살펴보니, 춘향이 일부종사 허랴허고 글을 지어 붙였으되, ‘대우춘종죽이요 분향야독서라.’ 왕희지 필법이로구나.
그때여 도련님이 처음 일이라 말 궁기가 맥혀 묵묵히 앉어 있거늘. 알심있는 춘향모친 도련님 말 궁기를 열을 양으로 “이애, 향단아 주안상 봐 오너라.” 술상을 들여 놓으니, 춘향 모친 술 한 잔 부어들고, “도련님, 박주허나마 약주나 한 잔 드시지요.” 그제야 도련님의 말 궁기가 열리난디, “이보게, 오늘 저녁 찾아 온 뜻은 술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늘 일기 화창하야 광한루 구경 갔다가, 춘향이 노는 거동을 보고 인연이 중매되어 나왔으니, 춘향과 날과 백년가약을 맺어줌이 어떠한가?” 춘향모 이 말을 듣고 일희일비로 말을 허는디,
“회동 성참판 영감께옵서 남원 부사로 오셨을 때, 일등 명기 다 버리고 나를 수청케 허옵기에 그 사또 모신 후에 저 아를 아니 낳소? 이조참판 승차하여 내직으로 올라가신 후에 그 댁 운수 불길허여 영감께서 상사허신 후 내 홀로 길러내어 칠세부터 글을 읽혀 사서가 능통허니 누가 내 딸이라 하오리까? 재상가는 부당허고 사서인은 부족하와 상하불급으 혼인이 늦어 가와, 주야 걱정은 되오나, 도련님 허신 말씀 장전의 말씀이니, 그런 말씀 말으시고 잠깐 노시다가나 가옵소서.”
도련님이 이 말을 들으시고 “이보게, 불충불효허기 전에는 잊지 않을 터이니 어서 허락하여 주오.” 춘향모친 생각허되, 간밤에 몽조가 있는지라. 꿈 ‘몽’자 용 ‘용’자 분명 이몽룡이 배필이라 생각허고 이면에 허락하였구나. “도련님, 그러면 혼서지 사주단자 겸하여, 증서나 한 장 써 주시지요.” “글랑은 그리 허게.” 지필묵을 내여노니 일필휘지허였으되, ‘천장지구는 해고석란이요, 천지신명은 공증차맹이라.’ “자, 이만허면 어떤가?” 춘향모 받어 간수허고 술 잔 올리며, “도련님 이제 약주나 한 잔 잡수시지요.” “오날 술은 경사주니 장모가 먼저 드시게.” 춘향모 술잔들고 한숨 쉬며 허는말이,
“세월도 유수 같다. 무남독녀 너 하나를 금옥같이 길러 내어, 봉황 같은 짝을 지어 육례 갖춰 여우자 허였더니, 오늘밤 이 사정이 사차불피 이리 되니 이게 모두 네 팔자라, 수원수구 어이허리? 너의 부친 없는 탓이로구나. 칠십당년 늙은 몸을 평생 의탁 허잤더니, 허망히 이리 되니, 삼종지 법을 쫓자 허면, 내 신세를 어쩔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