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의 개요(槪要)
*^^* 청정여여 *^^*
(1) 참선은 열린 마음(開心)의 지향
참선은 곧 '본 마음?참 나'를 밝히는 작업이다. 본 마음?참 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며, 청정무구하여 일찍이 티끌세간 속에서도 물든 일이 없으며, 완전하다고 한다. 참선은 이러한 본 마음?참 나에 대한 확고한 인식 내지는 신심(信心)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올바른 참선의 선결조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비록 겉보기에는 좌선의 자세나 모습 혹은 생활선의 취지 등이 유사한 듯 보인다 해도 불교의 참선과 여타 종교의 명상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적(史的)인 관점에서 볼 때, 참선 대중화의 기반을 닦은 이는 육조혜능(638~713)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육조스님은 결코 몸의 좌선을 강조하지도 않았으며, 마음으로 화두드는 것도 주창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볼 것'見性(견성)'을 강조하였을 따름이었다. 선지식의 지도로써 단박에 자신의 본성을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거나 부족한 것을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을 돌이켜 확인하면 되는 까닭에 '단박(頓)'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특수한 시간에 특수한 장소에서 특이한 사람들만이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행할 수 있는 열린 참선이어야만 한다. 본 마음?참 나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 참선이란 일체의 형식과 방법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선지식의 지도와 자신의 열려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고나 할까, 하지만 그 선지식조차도 다분히 자신의 마음가짐 여하에 달려있다. 마음이 열려있는 이에게는 자연 그대로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선지식 아님이 없을 것이나, 마음이 닫힌 사람 앞에는 비록 불?보살과 달마대사가 당장 나타난다 해도 크게 얻는 바가 없을 것이다.
문은 열기 위해서 닫는 것이다. 이제 비록 참선이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수행임을 밝혔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원칙일 뿐이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일정한 방법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곧 몸의 좌선(坐禪)이며 마음의 화두 챙김(看話)인 것이다.
(2) 참선의 기본방법―좌선은 안락(安樂)의 법문
좌선의 자세에 관해서는 종색스님의 《좌선의(坐禪儀)》를 참고하면 된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점은 허리를 바르게 펴는 것이며,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호흡도 자연스러운 것이 좋으며, 복식호흡을 권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들은 스스로가 오랫동안 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마음가짐이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해야 하는가. 첫째로 염두에 둘 것은 바로 좌선은 안락(安樂)의 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락이란, 말 그대로 편안하고 즐겁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좌선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편안하고 즐거워야 한다.
편안하고 즐겁기 위해서는 우선 만족해야 한다. 만족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추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일체의 바램을 놓고 쉬어야 한다. 심지어는 깨닫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하나의 헐떡임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일체 생각의 분별(思量分別)과 '나'라고 하는 생각, 내지는 깨치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모두 놓아버리고 다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대로만 하면 5분 앉으면 5분 부처다. 좌선이란 몸을 주저 앉혀 고요히 할 뿐 아니라, 마음을 주저 앉혀 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5분 앉으면 5분 부처라는 신념을 갖을 필요가 있다. 앉아 있는 부처는 더 이상 부처가 되고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성, 즉 우리 모두의 본 마음?참 나는 본래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릇됨만 없으면 자성(自性)의 계(戒)요, 더 이상 산란함만 없으면 자성의 정(定)이요, 더 이상 어리석음만 없으면 자성의 혜(慧)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행을 해나간다거나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하는 것도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무엇도 추구할 필요 없이 다만 5분 앉아있으면 5분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좌선을 하는 때에는,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께서도, 차라리 사대(四大)로 된 물질 몸에 대해서는 '나'와 '내 것'에 매일지언정, 의식(意識)에 대해서 '나'와 '내 것'에 매이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며, 우리의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고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의 분별(思量分別)이나 지견(知見)의 이해 및 알음알이로써 깨닫고자 해서는 백 천 만겁이 흘러 미륵보살이 하생(下生)한다 해도 깨치기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이러한 알음알이는 모두 부처님께 맡겨버리고,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하는 것이 오히려 보탬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3) 참선은 바로 지금(當下)
5분 앉으면 5분 부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서 다만 좌선할 뿐, 여타의 사념이나 동작이 일체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부분 '영원'을 희구한다. 하지만 그 '영원'이라는 것은 '바로 지금'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로 지금'의 이 순간들이 '영원'인 것이 아닐까. 과거는 이미 흘러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는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일 따름인 것이다. '바로 지금 '을 떠나서는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은 내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오늘로서 절대인 것이다.
따라서 '바로 지금'을 떠나서 마음의 평화나 육체적 안식을 구해서는 안 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마음 편안함을 성취할 수 없다면, 어느 때를 기다려 성취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후회, 설움 등 일체를 놓아버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걱정 따위도 떨쳐 버린 채, 오직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다만 좌선에 몰두할 뿐인 것이다.
이러한 연습은 매우 중요하다. 일단 이러한 마음가짐이 숙달되어야 비로소 생활선(生活禪)에 대해 입을 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좌선할 뿐', 이러한 습관이 어느 정도 익어가야만 비로소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 우면 잠잘 따름이라는 선사(禪師)들의 가르침이 와 닿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밥 먹을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잠잘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대화할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일할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살아갈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죽을 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좌선(坐禪)은 연습(練習)이요, 생활(生活)이 실수(實修)라고 하는 것이다.
좌선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시간과 공간인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다만 할 뿐'이라고 하는 '뿐'연습이다. 이렇게 연습해서 마침내 몸도 잊은 듯 마음도 잊은 듯(身心脫落)한 상태에서 이르게 되면, 점차 이러한 경지가 생활 깊숙이 스며들게 되어, 쓸데없는 상념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몸과 마음을 백퍼센트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참선은 닦는데 속하지 않는 것(禪不屬修)
상식적으로 사람들은 수행(修行)이라는 원인을 통해서 깨달음(覺)이라는 결과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상식적인 견해에 불과할 뿐이다. 참다운 도(道)는 상식에 기반 하면서도 상식을 초월한다.
참선은 닦는데 속하지 않는(禪不屬修)다. 닦아서 터득한다면 닦아서 이루어졌으니 다시 부서질 것이다. 즉 인과(因果)에 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닦지 않는다 하면 그냥 범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일까.
마조(馬祖)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자성은 본래 완전하니 선이다 악이다 하는데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자성(自性) 즉 본 마음?참 나는 본래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善)이라고 해서 취한다거나 악(惡)이라 해서 버린다거나 공(空)을 관찰해 선정에 들어간다거나 하는 것은 공연히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직 한 생각 망념(妄念)이 삼계 생사(三界生死)의 근본이니, 이 한 생각 망념만 없으면 즉시 생사의 근본이 없어지며 부처님의 위없는 진귀한 보배를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은 오직 이 한 생각 망념만 없애면 될 따름이다. 즉 도는 닦음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물들지만 않으면 될 뿐이다. 평상심(平常心)이 도이기 때문이다.
평상심이란 평상시의 마음을 뜻한다. 평상시의 우리 마음은 안팎의 역순경계(逆順境界)에 흔들리고 있는 듯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평온을 기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경계에 부딪쳐 홀연 분간하고 선택할 따름인 것이다.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처럼 안심(安心)을 주는 표현이 또 있을까. 그 무엇도 더 이상 멀리 찾을 것이 없으며, 완벽해지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다만 나 자신의 평상시의 마음 그대로를 유지해 나가기만 하면 될 따름이다.
본 마음?참 나에는 이미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에 입각한 수행이란 결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아니며, 본 마음?참 나를 지켜나갈 따름이다. 이것은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상태를 지켜나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날 때 얼른 이를 다스려야 하는데, 이때 유용한 것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5) 참선은 무심형 간화(無心形 看話)
닦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을 쉬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립다거나 밉다거나 하는 생각이 나거든, 그 생각을 얼른 화두로 돌려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 한 군데에 초점(Focus)을 맞추면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쉽다. 가령 동일한 장소에서 똑같은 소리가 지속해 날지라도, 정신을 다른 곳에 쏟다보면, 그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TV를 볼 때, 어느 한 채널에서 공포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고 하자. 그때에 공포심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차라리 채널을 돌려 다른 프로그램을 택함으로써 관심을 바꾸는 것이 분위기 전환에 도움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이치에 입각해서, 화두를 통해 무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무심형 간화(無心形 看話)이다. 이것은 집중형 간화(集中形 看話)와는 다르다. 집중형 간화는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화두에 몰두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삼매에 이르도록 하는 방식이다.
무심형 간화는 이와 달리 애당초 무심 상태로 출발하는 것이다. 즉 처음부터 화두를 챙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무심이란 아무런 잡념이 없다는 뜻이다. 곧 '무의식적 자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좌선을 하든 밥을 먹든 잠을 자든 그저 무심히 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러한 무심상태가 흔들릴 때에 얼른 화두를 챙기는 것이 무심형 간화이다. 역순경계(逆順境界)가 나타나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나는 순간 무분별심으로서의 화두를 챙김으로써 본 마음?참 나 즉 평상심으로 돌이킬 따름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순경계는 끊임없이 외부나 혹은 내심에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거의 지속적으로 화두를 챙겨나가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어쨌든 평상심으로서의 무심을 우선적인 전제로 하고 있는 점에서 집중형 간화와는 입각처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집중형 간화는 상당한 끈기와 집중을 요하는 데다가, 의도적 방법으로 인하여 자칫하면 상기병을 유발시킬 수 있다. 아울러 미래지향적 태도가 생겨나기 쉽다. 그래서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짧은 시일 안에 공부를 마쳐보겠다고 욕심 내어 달려들었다가 중도하차하기 쉽다.
그렇지만 무심형 간화는 철저히 현재 지향적이다. 자성청정심 즉 평상심이 도(道)임을 굳게 믿고, 현재에 몰두하면서 다만 흔들릴 때마다 화두를 챙겨 본 마음을 회복하면 그 뿐이다. 이 때의 화두는 마치 관운장의 청룡도와 같다. 청룡도는 시도 때도 없이 24시간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적과 맞닥뜨렸을 때 휘둘러야 유용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무심형 간화는 실생활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실생활에의 몰두에 참다운 가치가 부여되고, 나아가 주위와의 부딪힘 자체가 유용한 수행기회가 되어진다. 그럼으로써 좌선은 다만 연습에 불과할 뿐이요, 생활이 실전이 됨으로써, 우주가 수련장이고 만나는 이마다 선지식이 되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닦을 수 있는 열린 참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좌선의 자세
지혜를 배우는 사람들은 먼저 큰 자비심을 일으키고 넓은 서원(誓願)을 발하여 정미롭게 삼매(三昧)를 닦아야 한다. 중생을 제도하고자 서원하고 내 한 몸만을 위해 해탈을 구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인연을 놓아 버리고 만사를 쉬어, 몸과 마음이 하나 같고 움직이고 고요함에 틈이 없어야 한다. 음식의 양을 헤아려 너무 배부르거나 배고프지 않게 하고, 잠을 조절하여 모자라거나 지나치게 하지 말라. ―《좌선의》―
대승불교의 특징은 강력한 서원을 발하는 데 있다. 선불교도 역시 대승불교이다. 그러므로 좌선에 들어가기에 앞서 발원을 해야 한다. 참선의 목적이 견성(見性)에 있다면, '일체중생이 모두 다 견성하여 지이다'라고 하는 것이 좋다. 내가 빨리 깨쳐서, 중생들을 제도하겠습니다 한다면, '나'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오히려 깨달음에서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깨친 이의 특징이 아상(我相)의 소멸이라고 할진대, 오직 내가 수행해서 내가 깨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히면, 자칫 아상을 증장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인이라면 마땅히 '일체중생이 모두 다 깨달아 지이다'라고 발원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모든 인연을 놓아버리고 만사를 쉬어, 몸과 마음이 하나같고 움직이고 고요함에 틈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면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게 하라!'는 것이다. 몸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마음도 여기에 머물러 있을까? 아니면 집이나 혹은 다른 곳에 가 있지는 않는가? 과거나 미래를 오락가락하고 있지는 않는가?
여기 한 여행자가 있다고 하자. 만일 그 사람이 여행 떠나서는 집 걱정이나 하고, 집에 와서는 여행지에 철저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는 현명한 것일까? 아니면 집에 있을 때는 그저 집안 일에 충실하고, 여행을 떠나서는 그저 여행지에 충실한 것이 현명한 것일까?
쓸데없는 근심걱정 다 놓아버리고 오직 몸이 있는 이 곳에 마음이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시작인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다'라는 말이 있다. 과식(過食)을 하거나 자극성 있고 탁한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은 좌선(坐禪)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갈한 음식을 발우에 약간 적다 싶게 받아서,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것이 정갈한 마음에 도움이 된다. 소화가 잘 되어야 앉아 있기에 거북하지도 않고 졸립지도 않다. 잠도 6시간이면 충분하다. 생각을 적게 하고 언행을 절제하면 심신이 그다지 피곤하지 않은 까닭에 잠을 다소 적게 자더라도 쉽게 적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참선수련회의 모든 과정은 이러한 점들이 충분히 배려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잊어버리고 그저 남들 먹을 때에 함께 먹고, 잘 때에 자고, 좌선할 때 좌선하고, 절할 때 절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수행이 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아무쪼록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말고 그저 대중 속에 묻혀 하나가 되십시오. 그것이 무아(無我)를 체험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좌선을 할 때에는 고요한 곳에서 두터운 방석을 깔고 하라. 허리띠는 느슨하게 매고, 몸가짐을 단정히 한 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한다. 바른쪽 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왼쪽 발을 바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는다. 반(半)가부좌를 하는 것도 무방하지만 이때 왼쪽 발로 바른쪽 발을 누르도록 한다.
다음으로, 바른쪽 손을 왼쪽 발 위에 놓고, 왼쪽 손바닥을 바른쪽 손바닥 위에 놓는다. 두 엄지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고, 서서히 허리를 편 다음 전후 좌우로 몇 번 움직여 몸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는다.
왼쪽으로 기울거나 바른쪽으로 기울거나 앞으로 구부리거나 뒤로 넘어가게도 하지 말고, 허리와 척추, 머리와 목을 똑바로 세워 그 모양이 부도(浮屠)와 같게 한다. 이때 몸을 너무 긴장시켜 호흡을 부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귀와 어깨는 가지런히 하고, 코와 배꼽을 일직선상에 두며, 혀는 입천장에 대고, 입은 다문다. 눈은 반만 떠서 졸음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이와 같이하여 선정(禪定)을 얻으면 그 힘이 크게 넘칠 것이다.
옛날 선정을 닦던 스님들은 앉아서 항상 눈을 떴으며, 법운원통(法雲圓通)선사도 눈을 감고 좌선하는 사람들을 꾸짖기를 "깜깜한 산의 귀신 굴이 된다"고 하였다. 여기 깊은 뜻이 있으니 통달한 사람은 알 것이다.
자세가 안정되고 호흡이 조절된 다음에는 아랫배에 지그시 힘을 주고, 일체의 선악을 생각하지 말라. 잡념이 일어나면 거기에서 곧 깨어날 것이니 깨어나면 곧 사라질 것이다. 오래도록 인연을 잊으면 저절로 조금 이루어질 것이니, 이것이 좌선의 요긴한 비법이다.
―《좌선의》―
좌선의 자세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허리와 머리를 곧게 펴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힘을 주어서도 안되고, 전체적으로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눈은 항상 뜨는 것이 수마(睡魔)를 제거하는데 필요하다. 간혹 앉기만 하면 아예 졸려고 작정한 듯이 눈을 감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절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참선인은 항상 성성적적(惺惺寂寂)해야 합니다. 성성히 깨어있으면서도 적적히 고요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처음으로 좌선을 하는 사람은 흔히 다리가 아프고 망상이 불같이 일어나 괴로울 정도이다. 다리가 아프면 살며시 바꾸어 놓아도 무방하다. 망념이 일어나면 다만 망념인 줄 알아채면 저절로 사라지니, 절대로 붙들고 씨름할 필요가 없다. 번뇌는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면 도둑처럼 사라진다고 한다.
다리가 아프다고 하는 것은 육신이 살았다는 증거요, 망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마음이 살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다리가 아프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고, 망상이 많다고 괴로워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평상시에 밖으로만 치달리던 생각이 돌이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향하게 된 증거이니, 수행이 조금씩 되어가고 있다는 표시인 것이다.
호흡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좋다. 나아가 상기병(上氣病) 등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복식호흡을 권장하기도 한다.
좌선의 마음가짐
좌선은 안락의 법문
곰곰이 생각하면 좌선은 안락의 법문이지만, 사람들이 흔히 병을 얻는 것은 모두 마음을 잘못 쓰기 때문이다. 이 뜻을 잘 터득하면, 자연히 온몸이 편안하고 정신이 상쾌해질 것이다. 바른 생각이 분명하고 법의 맛이 정신을 도와 고요하고 맑은 기쁨을 누릴 것이다. 한 번 밝게 된 사람이라면 용이 물을 얻은 것 같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한 것과 같을 것이다. 아직 밝게 되지 못한 사람은 바람에 의해서만 불을 일으키려는 것과 같아서 그 힘이 달릴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판단하고 절대로 서로 속이지 말라.
도가 높아지면 마(魔)가 성하는 법이어서 역경과 순탄함이 만 가지나 된다. 그러나 바른 생각이 나타나면 그 어떤 것에도 거리끼지 않을 것이다. 능엄경(楞嚴經)과 천태지관(天台止觀)과 규봉(圭峰)의 수증의(修證儀)에 악마의 일을 두루 밝혀,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 해 두었으니 반드시 알아 두라. ―《좌선의》―
좌선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마음가짐이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해야 하는가?
첫째로 염두에 둘 것은 바로 좌선은 안락(安樂)의 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락이란 말 그대로 편안하고 즐겁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좌선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편안하고 즐거워야 한다.
편안하고 즐겁기 위해서는 우선 만족해야 한다. 만족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추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일체의 바램을 놓고 쉬어야 한다. 심지어는 깨닫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하나의 헐떡임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일체의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나'라고 하는 생각, 내지는 깨치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모두 놓아버리고 다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대로만 하면 5분 앉으면 5분 부처이다. 좌선이란 몸을 주저 앉혀 고요히 할 뿐 아니라, 마음을 주저 앉혀 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5분 앉으면 5분 부처라는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앉아있는 부처는 더 이상 부처가 되고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성, 즉 우리 모두의 본 마음?참 나는 본래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릇됨만 없으면 자성의 계(戒)요, 더 이상 산란함만 없으면 자성의 정(定)이요, 더 이상 어리석음만 없으면 자성의 혜(慧)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행을 해나간다거나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하는 것도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무엇도 추구할 필요 없이 다만 5분 앉아있으면 5분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좌선을 하는 때에는,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께서도, 차라리 사대(四大)로 된 물질 몸에 대해서는 '나'와 '내 것'에 매일지언정, 의식(意識)에 대해서 '나'와 '내 것'에 매이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며, 우리의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고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량분별이나 지견의 이해 및 알음알이로써 깨닫고자 해서는 백 천 만겁이 흘러 미륵보살이 하생(下生)한다 해도 깨치기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이러한 알음알이는 모두 부처님께 맡겨버리고,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하는 것이 오히려 보탬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좌선을 하는 가운데 특이한 현상이나 자취를 구하지 말 것이며, 혹 신통스럽거나 두려운 경지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 모두 다 요망한 일로 여겨 마음에 두지 말고 심상히 지나가 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신과의 진정한 만남
좌선이 끝나 일어설 때에는 천천히 몸을 움직인 후에 편안히 일어나고 갑자기 일어서지 말라. 좌선에서 일어난 뒤에는 어느 때나 항상 좌선의 방법에 의하여 선정(禪定)의 힘을 보호하고 유지하기를 어린애를 돌보듯 하라. 그러면 선정의 힘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정의 한 문이 가장 급한 일이다. 만약 선정을 잘 이루지 못하면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망망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슬을 찾으려면 물결이 가라앉아야 한다. 물결이 일렁이면 찾기 어렵다. 물결이 가라앉아 맑고 깨끗해지면 마음의 구슬이 저절로 나타난다.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거리낌없는 청정한 지혜가 다 선정에서 나온다"고 하였고, 《법화경(法華經)》에서는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닦고, 편안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기를 수미산처럼 하라"고 하였다.
범부와 성인을 뛰어 넘으려면 반드시 반연(攀緣)을 고요히 끊고, 앉아서 가고 서서 가려면(坐脫立亡) 선정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한 평생 힘을 기울여도 오히려 잘못될까 두려운데, 하물며 게을러 가지고야 어떻게 생사의 업(業)을 막아내겠는가?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선정의 힘이 없으면 죽음의 문에 굴복 당하고, 눈앞이 캄캄하여 갈팡질팡 헤매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라건대, 모든 참선하는 벗들은 이 글을 거듭거듭 읽고,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여 다 같이 바른 깨달음을 이룰지어다.
―《좌선의》―
실제로 좌선을 하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좌선이야말로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이다.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인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만 앉아만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고 힘든 것인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몇몇 유별난 분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잠시라도 무엇인가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듯하다. 때로는 한꺼번에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해낼 수 있어야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앉아있기만 한다는 사실이 마냥 낯설기만 하다. 두렵기도 하고. 평상시에는 이일 저 일에 쫓겨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는데, 막상 앉아있으려니 생가지도 않았던 근심걱정, 계획, 회한 등등이 마구 떠올라 괴로울 정도이다.
다리는 피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저려오기만 하고, 엉덩이는 배겨오고 졸음은 밀려오고, 죽을 맛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과정을 피해가서는 안 된다. 여태껏 전혀 돌아보지 못했던 자신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내 육신 하나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적응이 되어 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비로소 행동을 변화시킴으로써 사고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정상에 선 이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인생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심지어 남들과 직접 경쟁해 쟁취하는 운동경기나 무도시합조차도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술회한다. 외로운 고도.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싸움이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인생에 승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참선은 단순히 자신과 싸움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짜 나의 허상을 여실히 바라보고, 참 나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참 나의 발견. 참 나를 본 이라야 생은 물론 죽음에 임박해서도 당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서서 죽고 앉아 죽고 심지어는 물구나무서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참 나는 항상 되고, 즐겁고, '나'가 있으며, 깨끗하다.
우리 모두 참 나를 돌아보자! 또한, 느껴보자!
이것을 이 생에서 이루지 않으면 언제 이룰 것인가?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화두 드는 법
마음을 돌이킴(轉心)에는 무한 공덕이 있다
탐행자(貪行者)에게 선(善)이 일어날 때에는 믿음(信)이 강력해진다. 믿음은 탐욕과 가까운 덕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탐욕은 불선(不善)의 측면에서 풍부하고, 조잡하거나 거칠지 않은 것처럼, 믿음은 선(善)의 측면에서 풍부하고, 조잡하거나 거칠지 않다.
―《청정도론(淸淨道論)》―
인간의 여섯가지 유형
탐행자(貪行者)→신행자(信行者)
진행자(瞋行者)→각행자(覺行者)
치행자(癡行者)→심행자(尋行者)
탐(貪)?진(瞋)?치(癡) 세 가지 모두가 근본번뇌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서 인간 누구에게나 공통된 속성이다. 욕계(慾界)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이상, 탐욕은 근본적인 생명의 구성원리이며,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여 유발되는 성냄과, 중생으로서의 어리석음은 인간 모두가 예외 없이 갖추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한 인간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을 특징 지워 탐행자?진행자?치행자 등으로 구분 짓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와 각각 대비시켜 신행자?각행자?심행자를 설정해 놓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즉 탐행자와 상대시켜 신행자를, 진행자와 대비하여 각행자를, 치행자와 대비하여 신행자를 설정하고 있는 점은 중요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탐욕과 믿음, 성냄과 지혜, 어리석음과 사색 등이 동근이상(同根異相)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탐행자의 특징인 욕심을 완전히 부정하여 억제코자 하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그 욕심을 인정하되 노력의 방향을 바꾸어 도심(道心)으로 인도케 하자는 것이다. 즉 탐행자가 성욕?식욕 등의 기본적 욕심을, 붓다를 보고자 하는 욕심, 불법을 얻고자 하는 욕심, 계(戒) 등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 등으로 전향시켜 신행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정(有情)을 회피하고 부실한 과실을 보아 넘기지 못하는 진행자도, 그 성냄의 대상을 전환하여 일체의 유위법을 회피하고 실한 과실을 참지 못하는 각행자로 돌릴 수가 있다. 또한 일체의 선한 법이 아직 생기지 않아 혼란하고 통찰이 없어서 동요하는 치행자는, 오히려 하나하나 장애를 없애나가면서 통찰을 확립해나가는 심행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속성인 탐?진?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여 이에 역류하고자 인위적 노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힘(끊임없는 향상성)들을 오히려 도(道)를 깨우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코자 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대승선(大乘禪)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후대에 선종의 가르침에서 표방하고 있는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의 기초적 개념이 이미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정리하여 서술하고 있는 《청정도론》자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마음을 돌이킴에는 무한한 공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성향별로 적합한 선정방법(禪定方法)과 수행자세(修行姿勢) 및 수행장소(修行場所):
성 향
적합한 선정방법
적합한 수행자세
적합한 수행장소
貪行者
十不淨觀
十隨念 가운데 身至念
걷거나 서있는 것
더럽거나 혐오스런 곳, 동굴?초옥 등
瞋行者
四梵住
十遍 가운데 靑遍?黃遍?亦遍?白遍
눕거나 앉는 것
깨끗하고 쾌적한 곳
癡行者
數息觀
걷는 것
사방이 트인 곳
信行者
十隨念 가운데 佛隨念?法隨念?僧隨念?捨隨念?戒隨念?天隨念
눕거나 앉는 것
깨끗하고 쾌적한 곳
覺行者
死隨念?止息念
食厭觀
界差別
모두 적당
모두 적당
尋行者
數息觀
걷거나 서는 것
은폐된 곳, 동굴이나 은폐된 숲
깨침으로 법칙을 삼는(以悟爲則)다
근년 이래로 총림 가운데에 일종이 있어 삿된 설을 제창하여 종사된 자가 학자에게 일러 가로대, "다만 오로지 고요함만을 지켜라" 하니, 알지 못케라. 지킨다는 것은 이 어떤 사람이며, 고요하다는 것은 이 어떤 물건인고. 도리어 말하기를 고요하다는 것은 이 기본이라 하고 도리어 깨달음이 있음을 믿지 아니하여 이르되, "깨달음은 이 지엽이라"한다.
―《서장(書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는 간화선이라고 하는 수행방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요가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의 심신수행 방식과 삼매는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오로지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인위적인 의심의 응결과, 이의 타파를 통한 견성체험이라고 하는 방식의 수행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화두참구 방식의 참선을 하다가 벽에 부딪히는 경우, 자칫하면 회의감을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다.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화두를 가지고 끊임없이 씨름해 나간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도 않으며 진전도 쉽지 않은 터이므로,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염불선이나 위빠싸나 같이 얼핏 수긍이 가는 방식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심지어는 지금 이 주인공 자리를 믿고 다 놓아 버리면 몽땅 해결되어 지금 그대로 삼매이고 그대로 참선이고, 전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놈이 뭔고?' 하고 앉아 있으면 몇천 년 전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반규선사(盤珪禪師)같은 이도 의단(疑團)을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안(公案)은 의단이 없는 사람에게 의단을 짐지워서 불심을 의단으로 변하게 한다고 나무랐다. 말하자면 공안의 공부는 불필요하게 어려운 것을 사람들에게 떠맡기는 격이라는 주장이다.
이상과 같은 주장들은 중국 선종에서의 조사선(祖師禪)적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조사선에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본각적 신심(本覺的 信心)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부처인 것이다. 육조 혜능의 '마음땅에 그릇됨만 없다면 자성의 계(戒)요, 마음땅에 혼란 없으면 자성의 정(定)이요, 마음땅에 어리석음 없으면 자성의 혜(慧)'라는 말이나, 마조(馬祖)의 '도(道)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그저 헐떡이는 마음을 쉬고, 더 이상 삿된 생각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본래 부처인 것이다. 즉 고요함만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냥 그렇게 믿고 앉아 있는 다 해서 곧바로 도(道)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절대로 체험이 필요하다. 또한 정말로 그 경지에 이르렀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검증 절차도 요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법적인 진전을 더한 것이 바로 간화선이라 할 수 있다. 상기의 본각적 신심에 입각처를 두고 있으되, 화두참구라는 시각적 의심(始覺的 疑心)을 내는 구체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법은 대혜종고(大慧宗嗋, 1089~1163)가 특히 묵조사선(默照邪禪)을 공격하면서 그 폐단을 벗어나고자 제시한 것이다.
근년 이래로 일종의 삿된 스승이 있어 묵조선을 설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열두시간 가운데에 이 일을 관여치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되 소리를 짓지 말라, 금시(今時)에 떨어질까 두렵다" 하니, 왕왕에 사대부가 총명이근에 부린 바 되어 대부분이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다가, 자못 삿된 스승들의 고요히 앉아 있으라는 지령을 입고는 도리어 힘 덜음을 보고는 문득 이로써 족함을 삼아 다시 묘한 깨달음[妙悟]을 구하지 않고 다만 묵연함으로써 극칙을 삼나니, 내가 구업을 아끼지 아니하고 힘써 이 폐단을 구하니 지금 조금씩 허물을 아는 이가 있음이라. 원컨대 공은 다만 의정이 부수어지지 아니한 곳을 향하여 참구하되 행주좌와에 놓아버리지 말지어다. 어떤 승(僧)이 조주화상에게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화상이 답하되 "없다(無)" 하였으니 이 한 글자는 문득 이 생사의 의심을 깨뜨리는 칼인 것이다.
―《서장(書狀)》―
깨침은 묵조의 삿된 스승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미친 소리가 아니며, 제이두(第二頭)가 아니고, 방편의 말도 아니고, 접인의 말도 아닌 것이다. 다만 쉬어가고 쉬어가서 고요함에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묘한 깨달음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정이 파하기 전까지는 절대적으로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의 《무문관(無門關)》에서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그 제1칙인 조주무자(趙州無字)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떤 승(僧)이 조주화상에게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화상이 답하되 없다(無) 하였다. 무문(無門)이 가로되, 참선은 꼭 조사관을 뚫는 것이요, 묘한 깨달음은 요컨대 마음의 길을 끊어 다하는 것이라. 조사관을 뚫지 못하고 마음의 길을 끊지 못하면 이 모두 풀을 의지하고 나무에 붙어 있는 유령과 같은 것이니, 또한 일러라 어떠한 것이 이 조사관인가? 다만 이 한 개 무자(無字)가 이 종문의 한 관문이라, 드디어 지목하여 가로되 선종의 무문관이라 한다.―《무문관》―
더 이상 닦을 것도 깨칠 것도 없이 본래 그대로가 부처라는 것이 조사선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선의 경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관문을 통과하지도 않고서 본래 부처라느니, 제할 망상도 없고 진리를 구할 것도 없다느니 하는 것은 고목사선(枯木邪禪)에 불과하다. 따라서 참선을 통해 조사관(祖師觀)을 뚫어야 하며, 묘한 깨침을 통해 마음길이 끊어져 다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사관(祖師觀)이란 다름 아닌 무자공안(無字公案)인 것이다.
화두는 배로 참구(호흡법)한다
3백60 골절과 8만 4천의 털구멍을 한꺼번에 뭉쳐 한 개 의심덩어리를 만들어서 이 한 개의 무자(無字)를 참구(參究)하여 의심하되 주야로 공부하여 놓지 마라. 그러나 이 무자를 허무의 무(無)로 알려고도 하지 말며, 유무(有無)의 무로 알려고도 하지 말고, 마치 뜨거운 무쇠덩어리를 목구멍에 삼켜 넘긴 것같이 하여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이 하여 종전의 악지악각(惡知惡覺)을 탕진하고 오래오래 무르익게 하여 자연히 안팎이 한 조각을 이루어 나가면 벙어리가 꿈을 꾼 것처럼 다만 저 스스로만 앎이로다. ―《무문관 無門關》―
'3백60골절과 8만4천의 털구멍을 한꺼번에 뭉'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온몸으로 혼신을 다해서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무자(無字)라는 조사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의심덩어리를 지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몸조차 없는 듯 잊은 듯 '안팎이 한 조각을 이루어 나가도록'화두삼매에 드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본래 마음에는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화두를 어느 한 자리에다 묶어 놓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위에서 가리키는 바와 같이 온몸으로 간절히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머리로 생각이 집중되어 상기병(上氣病)에 걸리기도 쉽고, 또는 호흡의 부조화상태에 이르러 격심한 가슴의 통증을 수반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는 대체로 견성체험을 위해서 의정을 일으킬 것을 중시하며, 이러한 의정은 생사 일대사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화두를 간절히 용을 써서 참구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로 인한 부작용이 심심치 않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부작용과 시행착오를 덜 수 있는 방법으로서 화두 참구 시에 복식호흡을 병행해 나가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복식호흡을 통해서 화두를 들다보면 상기 부작용을 피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망상과 혼침도 줄일 수 있다. 즉 급하고 완만함이 그 중간을 얻어서, 상기병을 미연에 방지하면서 정진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복식호흡을 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드는 것은 간절한 의심을 갖되 '머리'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화두를 '배꼽 밑에 두고 관하라'고 권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눈은 전방을 주시하고 있지만, 마음의 시선을 배에 두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아랫배가 볼록하고 홀 쪽 함을 느끼면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각이 단전에 가 있게 되고, 생각이 단전에 가 머무는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의심을 내어 '이 뭐꼬?'하면 화두가 단전에 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머리로서만'이 뭐꼬 이 뭐꼬?'하면 기(氣)가 상승해 상기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단전에 무리한 힘을 주게되면 탈장할 우려가 있으니,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준비호흡과 본 호흡이 있다. 처음에는 준비호흡을 한다. 즉 공기를 가득 들이마셔 잠시 머물렀다 내쉬기를 두 세 번해서 폐 속의 묵은 공기를 완전히 방출한다. 그리고 나서 본 호흡을 한다. 이때는 공기를 조용히 들이마시되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도록 하고, 조용히 내쉬어 차츰 아랫배가 약간 들어가도록 8부 가량만 숨을 쉰다. 이 때 잠시 호흡을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뭐꼬?'하는 것이 화두를 배로 참구하는 요령이다.
간혹 내쉬는 숨만 있고 들이마시지를 못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곤란해진다. 그럴 때는 숨을 들이마실 때 아랫배가 홀 쪽 하도록 하고, 내쉴 때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한다. 즉 위와는 반대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면 가슴이 답답함이 사라진다. 어쨌든 호흡에 있어서는 전체적으로 숨이 가쁘거나 막히도록 하지 말고 무리가 없도록 자연스럽고 편안케 해야 부작용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차츰 요령을 터득하면 매번 숨쉴 때마다 화두를 들 필요가 없고, 화두가 사라지거나 딴 생각이 들어오면 화두를 한 번씩 챙긴다. 이 때 가벼운 생각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고 다만 화두만을 의심하면 된다.
이상과 같이 복식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챙기다 보면 자연히 머리로써 사량분별하지 않게 된다. 마음의 시선이 배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는 분별치 않는 것이다. 더러 화두를 전방에 놓는다거나 혀끝에 놓는 것이 좋다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화두를 어느 곳에 두는 것이 가장 좋은가는 참구하는 이가 실제로 활용해보고 선택할 일이다.
아무튼 화두는 염하거나 머리로써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면 될 것이다. 번뇌망상을 배에 맡기고 화두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처에 무심하면, 차별경계가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다. 화두에 모든 것을 맡겨버려 잡을 곳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沒巴鼻 無滋味)뱃속이 고민할 때가 문득 이 좋은 시절인 것이다.
염화두(念話頭)를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의심을 일으킬 때는 반드시 먼저 분노심을 내어 조주는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 하고 의심을 해야 한다. 이 분노심은, 소리를 내거나 내지 않거나 하는 것은 학인들이 스스로 선택할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하나의 조주는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 하는 의심을 의심해 가는 것이다.
조주의 무(無)를 간(看)하는 것이 아니다! 조주의 무(無)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기막힌 것이다.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
화두를 드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앞서 대오지심(待悟之心)을 경계하여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한 것도 그러한 알음알이가 의정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의정을 조금이라도 앞당겨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화두를 드는 요령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더러는 이러한 요령을 정확히 터득치 못함으로써 헛되이 공력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표적으로 조주의 무자(無字)를 간(看)할 때, 그저 무(無)! 무(無)!를 되풀이하여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야말로 잘못된 방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길을 갈 때도 무, 앉을 때도 무, 옷을 입거나 밥을 먹을 때도 무, 언제나 무라고 하며 혹은 천천히 하기도 하고, 혹은 호흡과 관련지어 급하게 하기도 하는 것 등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무(無)라는 말에 달라붙어서 의정을 일으켜야지, 그저 무, 무하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처음부터 의심을 지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분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따금씩 소리를 내어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고 하면 혼침과 도거가 사라진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해서 공부를 짓되, 정신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혹은 염화두(念話頭)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부를 짓되 다만 공안을 염(念)하지 말지니, 염해 가고 염해 오면 무슨 교섭(交涉)이 있으리오? 염하여 미륵불이 나올 때까지 이를지라도 또한 교섭함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아미타불을 염한다면 공덕이나 있지 않겠는가?
다만 하여금 염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각기 화두를 들어 일으켜야 할지니, 무자(無字)를 간(看)한다면 문득 무자(無字)상(上)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키고, 백수자(柏樹)를 간(看)한다면 문득 수자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키고, 일귀하처(一歸何處)를 간한다면 문득 일귀하처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몽산법어 蒙山法語》―
이처럼 단지 공안을 염해서는 안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미타불과 같은 불명호를 염하는 것이 이익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화두는 염하는 것이 아니고, 의심을 지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심을 지어 나가는 요령에서도 또한 우선은 화두 전체를 들어서 챙기고, 그리고 나서는 '도대체 일체 함령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셨거늘 조주는 무엇을 인(因)하여 무(無)라 일렀을까?', '어째서 무라 했을까?', '어째서?', '왜?', '?' 하는 식으로 지어 나가는 것이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들 때에도 요령은 마찬가지이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하여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에다가 의정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치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리고 '도대체 어디에다 두었을까?'하고 의심하고 의심해 나가듯이 의심을 지어 나가는 것이다. 다만 염하는 것과 의심해 나가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하여 골똘히 의심하고 의심할 때, 혼침과 도거는 자연스레 사라지고 성성하고도 적적한 경지가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화두가 잘 들리지 않으면 다시 화두를 처음부터 끝 구절까지 들어서 수미일관하게 하고 다시 의심을 지어 나가되, 그래도 쉽사리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포단에서 내려와 한동안 거니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혹 화두를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거든, 연거푸 세 번 들면 즉시 힘을 얻을 것이요, 혹 심신이 피로하고 지쳐 마음이 불안하거든, 조용히 땅으로 내려와 한동안 거닐다가 다시 포단에 앉아 본참화두를 가지고 전과 같이 밀고 나가도록 하라.
―《선관책진(禪關策進)》―
즉 앉아서 공부에 장애를 느낄 시에는 서서 다니며 공부해도 무방한 것이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오로지 서서 다니며 화두를 참구해서 깨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선요(禪要)》의 저자인 고봉화상의 경우가 그러했으며,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의 저자인 원나라 단운지철(斷雲智徹, 1309-?) 선사도 그러하였다.
성상(聖像) 앞에 향을 사르고 3년을 죽기로 한정하고 이렇게 서원하였다.
제가 만약 나태하여 앉거나 눕고자 하여 몸을 자리나 평상에 붙인다면 무간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이곳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어 지이다.
이로부터 밤낮으로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배회하였다. 두 끼의 공양 때에만 자리에 앉았을 뿐, 그밖에 차를 마시는 경우에도 역시 발을 멈추지 않았으며, 도우(道友)나 시주가 방문했을 때에도 또한 맞이하는 법이 없었다. 말은 일체 절제하였다. 단지 '만법귀일 일귀하처'만을 들을 뿐이었다. 다만 이 한 마디를 향하여 간절히 의심을 지어갈 뿐이었다.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
아침에 죽 먹을 때와 점심에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곤 일체 앉거나 기대지도 않고 화두를 참구하여 다만 의정만이 마음속에서 분명한 무심삼매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봉화상도 거의 3년이 되도록 두 끼니의 죽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에 앉지 않았고 피곤할 때에도 자리에 기대지 않고서 밤낮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다니며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했다고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이 외에 《선관책진(禪關策進)》의 독봉계선(毒峰季善) 선사도 육계(深溪)에서 정진할 때에 눕는 곳을 만들지 아니하고 다만 한 개의 걸상만을 놓고 정진하여 필경 깨침으로 법칙을 삼았다고 한다. 하루 저녁에는 졸다가 밤중이 된 것도 몰랐는데, 깨어서는 마침내 걸상마저 치우고 주야로 서서 다니며 참구하였다. 한번은 벽에 기대어 졸은 지라, 그후로는 '내 다시는 벽에도 기대지 않는다' 맹세하고 빈 땅 위를 홀로 걸으며 각고의 정진을 하여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한다. 한 마디로 수마(睡魔)와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걸어다니며 정진하는 것은 대체로 혼침이 심할 때에 주로 잠을 쫓고자 쓰는 방법이다. 물론 걸어다니면서 조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잠깐뿐이고, 앉아 수행하는 것보다는 훨씬 잠을 쫓기에 수월할 것이다. 따라서 비록 흔치 않은 예이지만, 이상과 같이 전적으로 서서 걸어다니며 수행해 깨친 예가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간화선은 대오선(待悟禪)이 아니다
지극한 이치를 궁구 함에는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음이라. 그러나 첫째로 마음을 두어 깨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일 마음을 두어 깨닫고자 기다리면, 기다리는 바의 마음이 도의 안목(道眼)을 장애하여 급할수록 더욱 더디어집니다. 단지 화두를 잡아가다가 문득 잡아가는 곳을 향해서 생사심(生死心)이 끊어지면, 이것이 곧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은 곳이다.
―《서장(書狀)》―
간화선에서는 본래 부처라는 것을 철저히 확인하기 위해서 깨침을 법칙으로 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깨침을 기다려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절인연이 무르익어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는 저 과실열매처럼 충분히 익을 때를 기다려야지, 생짜로 나뭇가지를 흔들어 떨어뜨리거나 미리부터 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익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즉 간절하기는 하되, 속효심(速效心)을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조급한 심정으로 알음알이를 내게 하며, 이러한 사량 계교야 말로 공부를 제대로 되지 못하게 하고 의정을 일으킬 수도 없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점은 깨침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깨닫겠다는 일념은 중요하다. 그러나 깨침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단지 화두에 몰두해서 생사심이 파하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깨침을 얻고자 기다리다 보면 그로 인하여 장애가 되어 깨침은 더더욱 더디어질 따름입니다. 간화선은 결코 대오선(待悟禪)이 아니다. 오히려 그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까지도 화두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녹여버려야 한다.
경산대혜 선사도 '평소에 지견이 너무 많아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이 앞에서 장애를 짓기 때문에 자기의 정지견(正知見)이 현전치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장애라는 것 또한 밖에서 온 것이 아니요, 또 별다른 일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분간할 것이 있겠는가? 이른바 십종병(十種病)이란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여기서 말하는 십종병이란 '조주무자'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가장 주의하여야 할 병통 열 가지를 말한다. 조주무자 화두는 모든 화두의 대표격이므로, 결국 이것은 일반적으로 화두참구에 있어서의 열 가지 병통을 말해 준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내용은 전적에 따라 약간의 출입이 있지만 대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가 있다.
① 유(有)와 무(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不得作有無會)
② 진무(眞無)의 무(無)로 생각지도 말고(不得作眞無之無卜度)
③ 도리(道理)로써 이해하려고 하지 말며(不得作道理會)
④ 의근하(意根下)를 향해서 사량하고 계교하지도 말며(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⑤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데서 캐내려고 하지도 말며(不得向揚眉瞬目處睵根)
⑥ 어로상(語路上)에서 활계(活計)를 짓지도 말며(不得向語路上作活計)
⑦ 일 없는 갑옷 속에 드날려 있지도 말며(不得揚在無事甲)
⑧ 화두를 들어 일으킨 곳을 향하여 알려 하지 말며(不得向擧起處承當)
⑨ 문자로써 이끌어 증명하지 말며(不得文字中引證)
⑩ 어리석음을 가져다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라(不得將迷待悟)
―《간화결의론》―
이러한 열 가지 병이란 것도 알고 보면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고 있다는 것이다. 대오지심(待悟之心)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으로 묶어 놓는 것이며, 나아가 깨침을 얻기 위해서 갖가지 계교나 사량분별 및 허망한 노력을 하게 만드는 근원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한 개 무자만을 간(看)할지언정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과 뚫고 뚫지 못한 것을 관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간화선을 닦는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기피하여야 할 점은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모를 뿐
그러므로 황면노자가 말씀하시되, 마음으로 망령되이 과거법을 취하지 말고, 또한 미래사에 탐착하지 말며, 현재에도 머무르는 바가 없어서, 삼세가 다 공적함을 요달하라 하시니라. 과거사에 혹 선(善)과 혹 악(惡)을 사량치 말지니, 사량한 즉 도를 장애하리라. 미래사를 계교치 말지니, 계교한즉 광란하리라. 현재사가 면전에 이르거든 혹 역(逆)과 혹 순(順)을 또한 뜻붙이지 말지니, 뜻을 붙인 즉 마음을 요동케 하리라.
―《서장(書狀)》―
깨침을 법칙으로 삼되, 깨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자칫 상충되기 쉬운 이러한 두 가지 원칙을 다 함께 살려나갈 수 있어야 올바른 화두 참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두 참구시에 오로지 깨침을 중시하다보면, 다만 미래의 향상사에만 마음을 두어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으로 매어놓고 중생지견 가운데서 알음알이를 지어 깨닫기를 기다리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묵조선 측으로부터 간화선은 대오선이라는 비난도 받게 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본래 부처라는 입장에 치중하다보면 깨침을 법칙으로 삼지 않고 도리어 방편시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입장을 함께 살려나갈 수 있는 중도적 방법은 무엇일까?
본래 불교에서는 제행무상의 도리를 중시하고 있다. 즉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라고 할 때 그 현재는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침을 기다리지 않고 화두를 드는 입장에서는 앞의 시간과 뒤의 시간이 끊어진 상태인 전후제단(前後際斷)이 되어야 한다. 일도양단(一刀兩斷)하여 더 이상 뒤를 생각하거나 앞을 사량치 아니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현전일념(現前一念)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일념을 단속해서 화두를 들것이요, 깨치고 못 깨치고에 상관없이 오직 '이 뭐꼬'하는 의심덩어리만이 홀로 뚜렷해지는 의단독로(疑團獨露)를 달성하고자 노력할 뿐인 것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의단을 갖는다는 것은 견성체험을 살리는 입장임을 알 수 있다. '모르겠습니다'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로소 알 수 없는 의심이 일어난다. 정작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하는 바로 이 '모르는 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 견해' '내 여건' '내 상황>'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잘못 알고 있는 악지 악각(惡知 惡覺)을 쓸어 없애주는 것이다. 즉 '나, 나의, 나를'을 사라지게 하며, 비로소 올바른 정지견(正知見)이 드러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경각을 얻기 전에는 완전히 바보처럼 멍청이처럼 여올여치(如兀如痴)하게 지내면서 분별지해로써 알려고 하지 말고, 다만 모른 채로 오직 모를 뿐인 화두를 챙겨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깨치고 못깨치고에 상관없이 화두가 한 조각을 이루어(打成一片) 의단이 독로해지고 시시각각으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느껴나가 안락의 법문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요컨대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는 간화선의 입장에서는 비록 견성체험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견성에 너무 얽매여서도 안 된다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본래 부처임을 확신하는 조사선의 초기적 입장을 기반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번뇌망상을 다스려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표명하고 있다. 본래 부처임을 확실히 믿는다면, 본래 부처인데 왜 이리 차별적 번뇌망상이 끊이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러한 근원적 의심을 비롯한 천가지 만가지 의심을 오직 하나의 의심으로 응축시켜 '오직 모를 뿐'인 마음가짐으로 화두로 곧장 나아가, 이 한 가지 의심덩어리를 타파시킴으로써 천만가지 의심을 일거에 타파하고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참다운 본래 부처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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