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 Una Cabeza

Various Artist
to moonn6pence  from shootingstar

If you make a mistake, if you get all tangled up, you just tango on...

만일 실수를 하면 스텝이 엉키게 되는데, 그게 바로 탱고입니다.

아르헨티나의 버스나 택시 기사들은 흔히 3면으로 된 사진 액자를

수호성인 모시듯 차 안에 붙박이로 세워두거나 걸어두고 있다. 왼편에는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로 유명한 ’에비타’ 에바 페론, 오른편

에는 축구의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 그리고 그 가운데 걸린 사진의

주인공은 ‘탱고의 황제’라는 이름으로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는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1887∼1935)이다.

가르델은 1887년 12월12일에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났고 원래 이름은

샤를 가르드였다. 가르델의 아버지에게는 이미 다른 처자(妻子)가

있었기 때문에 가르델을 낳은 어머니는 그를 혼자 힘으로 키워야 했고,

가르델이 네살일 때 그를 데리고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세탁소에서 다림질하는 일로 생계를 꾸리면서 가르델을 힘겹게

초등학교에 보냈다. 이른 나이부터 공장 심부름꾼·시계 제조공 보조·

출판사 식자공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자라난 가르델은 극장에

취직해 막을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열렬한 오페라 팬이

됐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그는 그날의 주인공 테너를 흉내내며 멋지게 오페라

아리아를 불러 동료 일꾼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자 가르델은 차츰 술집이나 카페에서 스스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갈수록 많은 청중이 그의 노래를 들으러 몰려들었고,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다른 구역의 스타 싱어와 가르델의 노래대결을 주선하기도 했다

탱고 역사에서 초기 몇 십 년간은 춤과 기악이 발전된 시기였다.

그런데 1917년에 가르델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엠파이어 극장에서

’슬픈 나의 밤 Mi noche triste’을 노래하면서부터 탱고의 두 번째

표현양식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건 ‘탱고 칸시온’이라고 불리는

’가사가 있는 노래’였다.

가르델 이전에도 탱고곡에 더러 가사가 붙여지긴 했지만,

그 깊은 서글픔과 한을 가르델 만큼 탁월하게 청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수가 없었기 때문에 탱고가 노래로 발전할 수 없었던 것.

’그가 부르는 모든 노래는 청중에게 들려 주는 가르델 자신의 이야기

처럼 들렸다.” 반주를 맡은 연주자들은 그의 노래를 그렇게 평했다.

타고난 아름다운 음색과 수려한 외모가 성공의 발판이 되긴 했지만

가르델은 자신의 노래와 작곡기법을 향상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수이기도 했다.

음악공부를 할 기회가 없어 악보를 읽을 줄도 몰랐지만 자신이 부르는

노래의 대부분을 직접 작곡했다. 새 멜로디가 떠오르면 반주자에게 부탁

해 악보로 옮기는 방법이었다. 1928년 파리에서 데뷔한 그는 하룻밤 만

에 파리 시민들의 영원한 연인이 됐고, 이후 줄곧 유럽과 아르헨티나를

왕래하며 활동했다.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그라모폰의 발명과 녹음 기술의 발전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면, 카를로스 가르델은 유성영화의 출발로 인해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가 주연으로 출연해 노래를 부른 최초의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불빛들’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고 파라마운트사는 행여 가르델을 빼앗

길세라 서둘러 다음 영화 출연 계약들을 체결했다. 34년에 뉴욕을 출발점

으로 미국 순회공연을 가진 가르델은 이듬해에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

하는 날’을 촬영한 뒤 남미 순회공연을 떠났다가, 콜럼비아 공항에서

비행기 이륙 사고로 죽었다.

예술가로서의 삶과 결혼을 병행할 수 없다고 생각해 독신을 고수했던

가르델은 카루소와 마찬가지로 성공의 정점에서 48세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무덤가에는 날마다 새 꽃다발이 놓이고 그의 동상(銅像) 손가락에서

는 지금도 끊임없이 팬들이 꽂아주는 새 담배가 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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