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딸은 자주 열병을 앓았지만
정신이 들 때마다 저를 읽곤 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누구라도 있으면 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죠. 방안에 홀로
가만히 누워있는 날이면 습관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정말 꿈속에서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그 말을 들으며, 저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언제부터 존재했던 것일까요.
아니, 저는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때는 그런 질문들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쉴 새 없이 저를
재잘거렸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점점 살이 붙고 탐스러워졌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아이가 저를 그렇게
만들었죠. 저는 종종 책을 읽다
잠든 아이가 궁금해 책장 속에서
꼬리를 살랑거렸습니다. 무거운 종이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몰래 아이의
얼굴을 훔쳐보기도 했죠.
아이는 저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소중한 누군가에게서 전해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대답할 수 있는 입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저는 책일 뿐이었죠.
아이는 누운 자리에서 소녀가
되었습니다. 머리맡에는 언제나
낡은 제가 놓여 있었죠.
열여덟 번째 생일을 앞둔 어느 날
소녀는 끈질긴 기침을 이기지
못하고, 오랫동안 누워있던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퀭한 눈의 사내가
아이와 함께 저를 땅에 묻었습니다.
"이제 너도 편히 쉬어라.“
오랫동안 아끼던 물건에는
혼이 깃든다고 합니다.
저는 깃든 혼이 아니라
빚은 혼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빚은 혼.
저는 고양이였고, 그림이었고,
책이었고, 누군가의 소중한 선물이었으며,
종내에는 이야기 그 자체였습니다.
책에서 빠져나온 저는 무덤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사뿐하게 소녀의 무덤을
덮은 흙을 밟고 걸으며,
저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가
그림으로 변했다가
노래가 되었다가 책이 되고,
다시 고양이가 되었습니다.
"너는 누구니?"
한 소년이 저를 발견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이야기가 빚은 혼이야."
처음으로 누구의 의지도 아닌
제 의지로 땅을 딛자 허기가
밀려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고양이의 모습이었기 때문일까요.
단숨에 잠자리 하나를 앞발로
낚아채 먹어 보았으나 허기는
가시지 않았습니다.
"너는 어디에서 왔니?"
소년은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왔어. 소중한
이야기들이 나를 만든 거야."
저는 계속해서 걸으며
다양한 형태로 변했습니다.
"난 어디로 가야 할까?"
지나가는 바람을 향해 물었습니다.
바람이 조용히 답했습니다.
"넌 그저 존재하면 돼. 이야기는
계속될 거야. 그 어떤 형태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