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 이상화)

박일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시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달이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게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 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魂)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무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봄이 가득한 들판을 걸으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노래한 시다. 이상으로서의 조국 해방에 대한 염원과 일제의 압제라는 상반된 상황의 현실에서 느끼는 시인의 아픔이 마지막 연의 “다리를 절며”라는 표현 속에 담겨져 있다.
* 지심 : 눈밭에 난 잔풀
* 삼단 : 숱이 많고 길이가 긴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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