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스케치

정태춘
앨범 : 92년 장마, 종로에서

해는 기울고 한낮 더위도 식어
아드모어 공원주차장 밴치에는 시카노들이
둘러앉아 카드를 돌리고 그
어느 건물보다도 높은 가로수
빗자루 나무 꼭대기 잎사귀에 석양이 걸릴 때
길 옆 담벼락 그늘에 기대어 졸던 노랑머리의 실업자들이
구부정하게 일어나 동냥 그릇을 흔들어댄다
커다란 콜라 종이컵 안엔 몇 개의 쿼터, 다임, 니켈
남쪽 빈민가 흑인촌 담벼락마다 온통 크고 작은 알파벳 낙서들
아직 따가운 저녁 햇살과 검은 노인들 고요한 침묵만이
음, 프리웨어 잡초 비탈에도 시원한 물줄기의 스프링 쿨러
물 젖은 엉겅퀴 기다란 줄기 캘리 차창 밖으로 스쳐가고
은밀한 비벌리 힐스 오르는 길목
티끌, 먼지 하나 없는 로데오 거리
투명한 쇼윈도 안엔 자본보다도 권위적인 아, 첨단의 패션
엘 에이 인터내셔널 에어포트 나오다
원유 퍼 올리는 두레박들을 봤지
붉은 산등성이 여기 저기, 이리 끄덕 저리 끄덕
노을빛 함께 퍼 올리는 철골들
어둠 깃들어 텅 빈 다운타운 커다란 박스들과 후진 텐트와 노숙자들
길 가 건물 아래 줄줄이 자리 펴고 누워
빌딩 사이 초저녁별을 기다리고
그림 같은 교외 주택가 언덕 길 가 창문마다 아늑한 불빛
인적 없는 초저녁 뽀얀 가로등 그 너머로 초승달이 먼저 뜬다
마켓 앞에서 식수를 받는 사람들 리쿼에서 개피담배를 사는 사람들
버거킹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사람들
아, 아메리카 사람들
캘리포니아의 밤은 깊어가고
불 밝은 이층 한국 기원 코리아타운
웨스트 에잇스 스트리트 코메리칸 오피스
주차장 긴 철문이 잠길 때
길 건너 초라한 아파트 어느 골목에서
엘 에이 한 밤의 정적을 깬다
백인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미국에 와서 백인들을 잘 못 보겠어
한국 관광객 질겁에 간 떨어지는 총 소리
따당, 따당땅, 따당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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